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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 히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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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거리트 히긴스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전쟁 특파원으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여러 국제 분쟁을 취재했다. 1920년 홍콩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은 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한국 전쟁 보도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베를린 지국장과 모스크바 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반공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을 보도하며 동료 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탐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66년 리슈만편모충증으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헌을 기려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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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 히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1년 10월 라이프 잡지 기사에 실린 사진 (칼 마이던스 촬영)
이름마거리트 히긴스
원어 이름Marguerite Higgins
별칭매기 히긴스
출생일1920년 9월 3일
출생지홍콩
사망일1966년 1월 3일
사망지미국 워싱턴 D.C.
매장지알링턴 국립묘지
직업
직업기자, 전쟁 특파원
학력
교육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
경력
소속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
가족
배우자스탠리 무어 (1942년 결혼, 1947년 이혼)
윌리엄 에번스 홀 (1952년 결혼)
자녀3명 (1명은 출생 직후 사망)
수상
주요 수상최초의 여성 국제 보도 부문 퓰리처상 수상
여성 전쟁 특파원의 평등한 접근권 옹호
기타
참고 자료타임 매거진 1950년 9월 25일자, 존 H. 마이클리스 대령의 "연대의 자부심" 기사
링크

2. 생애

마거리트 히긴스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렌스 히긴스는 해운 회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드 고다르 히긴스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었다. 히긴스는 어린 시절 말라리아를 앓아 베트남에서 요양하기도 했다.[22]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노력으로 히긴스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2][3]

193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학생 신문 ''The Daily Californian영어''에서 활동하며 언론인의 꿈을 키웠다. 1941년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을 다니며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캠퍼스 통신원으로 활동했다.[2][3]

1942년,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정식 기자가 되었고, 1944년에는 유럽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취재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 해방을 목격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을 보도하는 등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4] 1947년에는 베를린 트리뷴 지국장이 되었다.[5]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전쟁의 참혹함과 한국인들의 고통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 있었고, 여성 종군기자라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전선에 남아 취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5][6] 한국 전쟁 보도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7]

이후에도 히긴스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니키타 흐루쇼프 등 세계 지도자들을 인터뷰하고, 모스크바 지국을 설립하는 등 국제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2] 1963년에는 뉴스데이로 옮겨 남베트남을 취재하며 베트남 전쟁의 현실을 알렸다.[10]

1965년 남베트남 취재에서 돌아온 후 리슈만편모충증에 걸려 투병하다 1966년 1월 3일 워싱턴 D.C.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4]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남편 옆 묘지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히긴스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렌스 히긴스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해운 회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드 고다르 히긴스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었다. 히긴스의 부모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에서 만나 결혼 후 홍콩으로 이주했다.[2] 히긴스는 생후 6개월 만에 말라리아에 걸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베트남의 산악 휴양지에서 요양했다.[22]

3년 후,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와 오클랜드에 정착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히긴스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히긴스는 자신의 자서전 ''News Is a Singular Thing''에서 이 시기를 어린 시절 최악의 날로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바로 그날, 나는 커서 어떻게 생계를 꾸릴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1930년대에 자란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우리 사회에서 나를 위한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3]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히긴스의 아버지는 은행에 다시 취직했고, 어머니는 프랑스어 교사직을 맡는 대가로 버클리의 안나 헤드 스쿨(현 Head-Royce School영어)에 히긴스를 위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2]

히긴스는 1937년 가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소로리티 단체인 Gamma Phi Beta영어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학생 신문인 ''The Daily Californian영어''에 글을 기고했으며, 1940년에는 편집장을 역임했다. 1941년, 히긴스는 버클리에서 프랑스어 학사(Bachelor of Arts, B.A.)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히긴스는 신문사 취업을 목표로 뉴욕으로 향했다. 그녀는 여행 가방 하나와 단돈 7달러를 가지고 1년 동안 구직 활동을 할 계획이었고, 실패하면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프랑스어 교사가 될 생각이었다.[4][3] 1941년 8월, 뉴욕에 도착한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 시티 오피스로 찾아가 당시 시티 에디터였던 L. L. "엔젤" 엔젤킹(L. L. "Engel" Engelking)을 만났다. 엔젤킹은 히긴스에게 당장 일자리를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한 달 후 다시 오면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3]

히긴스는 뉴욕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Columbia University School of Journalism)에 지원했다. 그러나 입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프로그램 시작 며칠 전 입학을 시도했지만, 대학교 측에서는 여성에게 배정된 자리가 모두 채워졌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간청과 면담 끝에, 대학교 측은 히긴스가 이전 교수들로부터 성적표와 추천서 5통을 모두 제출할 수 있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히긴스는 즉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버클리에서 컬럼비아 대학교로 모든 자료를 보내도록 준비했다. 개강 직전 한 학생이 프로그램에서 중퇴했고, 히긴스는 입학할 수 있었다.[3]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인기 있는 캠퍼스 통신원 자리가 동기인 Murray Morgan영어에게 돌아간 것에 실망한 히긴스는 남성이 대부분인 동기들을 능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교수 중 한 명인 John Tebbel영어에 따르면, 히긴스는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겸비했으며, 학급 최고 수준이었다.

> 별들로 가득 찬 학급에서도 그녀는 눈에 띄었다. 매기는 금발 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똑같이 눈부신 지능을 거의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야망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이고 본질적으로 남성우월주의적인 사업인 저널리즘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 강인해야 했고, 매기는 엄청난 야망에 이끌려 강인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곧 분명해졌다.[2]

1942년, 히긴스는 동기를 대신하여 트리뷴의 캠퍼스 통신원이 되었고, 이는 정규직 기자직으로 이어졌다.[2]

2. 2. 언론인 경력

1941년 8월,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시티 에디터였던 L. L. 엔젤킹을 찾아갔다. 엔젤킹은 당장 일자리를 제안하지 않았지만, 한 달 뒤 다시 오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3] 히긴스는 뉴욕에 머물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입학 과정은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 시작 며칠 전 입학을 시도했지만, 여성에게 배정된 자리가 모두 찼다는 답변을 들었다. 여러 번의 간청과 면담 끝에, 대학교 측은 이전 교수들로부터 성적표와 추천서 5통을 제출하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히긴스는 즉시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필요한 자료를 모두 컬럼비아 대학교로 보냈다. 개강 직전 한 학생이 중퇴하면서 히긴스는 입학 허가를 받았다.[3]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캠퍼스 통신원 자리는 동기인 머레이 모건에게 돌아갔지만, 히긴스는 남성이 대부분인 동기들을 능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교수였던 존 테벨은 히긴스의 아름다움과 지성이 뛰어나 학급 최고 수준이었다고 회상했다.

> 별들로 가득 찬 학급에서도 그녀는 눈에 띄었다. 매기는 금발 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똑같이 눈부신 지능을 거의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야망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남성 중심적인 저널리즘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 강인해야 했고, 매기는 엄청난 야망에 이끌려 강인함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곧 분명해졌다.[2]

1942년, 히긴스는 동기를 대신하여 트리뷴의 캠퍼스 통신원이 되었고, 이는 정규직 기자로 이어졌다.[2] 전쟁 특파원을 꿈꿨던 히긴스는 2년간 일한 후 1944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 경영진을 설득하여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런던파리에 주둔한 후 1945년 3월 독일로 재배치되었다. 1945년 4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 해방을 목격했고, SS 경비병의 항복 과정에서 도움을 준 공로로 미 육군 훈장을 받았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과 소련베를린 봉쇄를 보도했다.[4] 1947년에는 베를린 트리뷴 지국장이 되었다.[5]

1950년, 히긴스는 시카고 트리뷴 도쿄 지국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동료들로부터 냉담한 환영을 받았다. 이는 베를린의 동료가 쓴 소설 「쾌락의 비명」 때문이었는데, 이 소설은 베를린의 여성 기자가 기사를 훔치고 정보원들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소설가 토니 하워드가 히긴스를 모델로 주인공을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어 도쿄 직원들 사이에서 의심과 적대감이 커졌다.[5]

그녀가 일본에 도착한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히긴스는 현장에 도착한 최초의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6월 28일, 히긴스와 동료 세 명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목격하고 한강 북쪽에 고립되었다. 다음 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수원에 있는 미군 본부에 도착했지만, 월턴 워커 장군은 여성은 전선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내렸다. 히긴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호소했고, 맥아더는 "한국 여성 특파원 금지는 해제되었습니다. 마거릿 히긴스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고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라는 전보를 트리뷴에 보냈다.[6] 이는 모든 여성 전쟁 특파원들에게 중대한 돌파구였다. 한국에서의 초기 추방과 맥아더의 결정으로 히긴스는 전선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미국에서 큰 뉴스가 되어 그녀를 유명인으로 만들었다.[5]

한국에 있는 동안, 트리뷴은 한국 전쟁 취재를 위해 호머 비가트를 파견했고, 그는 히긴스에게 도쿄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히긴스는 거절했고 트리뷴은 그녀가 남도록 허락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경쟁적인 불화가 발생했고, 결국 1951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을 공동 수상하게 되었다.[7] 그들은 다른 네 명의 남성 전쟁 특파원들과 함께 이 영예를 공유했다.

한국에서의 보도로 히긴스는 해외기자클럽으로부터 1950년 조지 폴크 기념상을 수상했다.[8] 그녀는 ''콜리어스'' 잡지의 공동 특별호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의 예고''에 "러시아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다.[9]

히긴스는 남은 생애 동안 국제 문제를 취재하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니키타 흐루쇼프, 자와할랄 네루와 같은 세계 지도자들을 인터뷰했다. 1955년, 그녀는 트리뷴의 모스크바 지국을 설립하고 지국장이 되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소련에 재입국이 허가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었다.[2]

1963년, 히긴스는 뉴스데이에 합류하여 남베트남 취재를 맡았고, "수백 개의 마을을 방문하고" 주요 인물 대부분을 인터뷰하여 "우리의 베트남 악몽"이라는 책을 썼다.[10] 남베트남에 있는 동안, 히긴스와 뉴욕 타임스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탐 사이에 또 다른 불화가 발생했다.[2] 이는 이념적 차이와 자존심에 기반한 것이었다.[5]

20년 이상 전쟁 특파원으로 활동한 히긴스는 확고한 반공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많은 불교 위기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믿었다. 이는 핼버스탐의 견해와 상반되었는데, 그는 히긴스를 "전성기를 지난 매국노로, 반공주의적 견해가 선전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5] 당시 베트남에 있던 많은 젊은 특파원들과 핼버스탐은 지엠 정권에 반대하고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도했다. 히긴스는 그들이 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가 없다고 믿었고, 종종 그들을 사이공 밖으로 나가지 않는 로버 보이스라고 불렀다. 히긴스와 핼버스탐의 라이벌 관계는 1966년 그녀의 사망 후에도 핼버스탐이 계속해서 그녀를 비판하면서 끝나지 않았다.[5]

2. 3. 한국 전쟁 종군 기자 활동

뉴욕 헤럴드 트리뷴 소속 종군기자로 1950년 6.25 전쟁 개전 초기부터 12월까지 대략 6개월간 취재 활동을 하였고 1951년 1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6.25 전쟁 종군기자의 아이콘이기 때문에 6.25 전쟁 전 과정을 취재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개전 초기인 6월 27일 한국에 들어와 대략 6개월간 취재 후 1951년 1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40]

히긴스는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6월 28일, 히긴스와 세 명의 동료는 한강 인도교 폭파를 목격했고, 그 결과 한강 북쪽에 고립되었다. 다음 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수원의 미군 본부에 도착했으나,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는 "여성은 전선에 있어서는 안 되며 군대는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숙소를 마련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히긴스에게 즉시 추방 명령을 내렸다.[26]

히긴스는 워커의 상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직접 호소했고, 맥아더는 이후 트리뷴에 "한국 여성 특파원 금지는 해제되었습니다. 마거릿 히긴스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고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라는 전보를 보냈다.[6] 이는 모든 여성 전쟁 특파원들에게 중대한 돌파구였다. 한국에서의 초기 추방과 맥아더의 이후 결정으로 히긴스는 전선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미국에서 큰 뉴스가 되어 그녀를 일종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5]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한국 전쟁 취재를 위해 비가트를 파견했고, 그는 히긴스에게 도쿄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거절했고 트리뷴은 그녀가 남도록 허락했는데,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경쟁적인 불화로 이어져 1951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을 공동 수상하게 되었다.[7] 그들은 다른 네 명의 남성 전쟁 특파원들과 함께 이 영예를 공유했다.[27]

귀국 후 6개월간의 취재활동을 바탕으로 1951년 1월 'War in Korea'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6.25 전쟁 6개월간의 취재기를 종합하여 1951년 발간한 비망록 'War in Korea'를 통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인천 상륙작전을 취재하여 뉴욕 헤럴드 트리뷴 9월 18일자에 게제된 기사를 통해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40]

2. 4. 한국 전쟁 이후 활동

한국 전쟁 보도로 히긴스는 1950년 해외기자클럽(Overseas Press Club)으로부터 조지 폴크 기념상(George Polk Memorial Award)을 수상했다.[8] 1951년에는 다른 저명한 언론인 및 정치인들과 함께 ''콜리어스(Collier's)'' 잡지의 공동 특별호 ''우리가 원하지 않는 전쟁의 예고''에 "러시아 여성들(Women of Russia)"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다.[9]

히긴스는 남은 생애 동안 국제 문제를 계속 취재하며 프란시스코 프랑코, 니키타 흐루쇼프, 자와할랄 네루와 같은 세계 지도자들을 인터뷰했다. 1955년, 그녀는 트리뷴(Tribune)의 모스크바 지국을 설립하고 지국장이 되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소련에 재입국이 허가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었다.[2]

2. 5. 사망



히긴스는 1965년 11월 남베트남 취재에서 돌아온 후 리슈만편모충증에 걸려 1966년 1월 3일 워싱턴 D.C.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유해는 남편과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4]

3.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육군 장관 로버트 포터 패터슨은 1946년 11월 23일 워싱턴 D.C.에서 히긴스를 포함한 종군 기자들을 표창했다.[37] 2010년 9월 2일, 대한민국 정부는 히긴스에게 수교훈장 중 최고위 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1950년대 초 한국의 생존 투쟁을 보도한 공적을 평가한 것이다.[35]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히긴스의 딸과 손자가 참석하여 훈장을 받았다.[35]

3. 1. '귀신 잡는 해병대' 보도 논란

1990년대 후반부터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작성한 '통영 상륙 작전' 보도 기사에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한국 해병대는 악마 조차도 잡을 정도였다.)" 혹은 "Ghost-Catching Marines" 표현이 존재하였고 이 표현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해병대 관련 서적과 언론 기사 등에 반복적으로 인용되기 시작하여 그 결과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38][39]

그러나 2024년 해병대사령부 소속 해병대 군사연구소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사원문 전수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 결과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작성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사 중에서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혹은 "Ghost-Catching Marines"라는 표현이 들어간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져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의 마거리트 히긴스 기사 유래설은 완전히 낭설로 판명되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는 통영 상륙 작전과 관련된 일반적인 전황 보도 기사 및 대한민국 해병대와 관련된 어떠한 기사도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사원문 전수조사 결과에 따라 해병대에서도 공식 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 콘텐츠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의 마거리트 히긴스 기사 유래설을 2024년 7월 삭제하였으며([https://web.archive.org/web/20230601221529/https://rokmarineboy.tistory.com/948 정정 전] => [https://rokmarineboy.tistory.com/948 정정 후]) 통영시가 관리 주체인 해병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도 2024년 6월 마거리트 히긴스 관련 전시물 철거를 완료하였다.

그 외 마거리트 히긴스 기사 유래설이 포함된 SNS 콘텐츠를 게시하였던 해군, 국방부(국방홍보원, 전쟁기념관 등 포함), 국가보훈부, 외교부, 인사혁신처, 한국우편사업진흥원, 경상남도, 통영시, 창원시, 오산시 등 지방자치단체 포함 정부기관들이 관련 SNS 콘텐츠를 2024년 6월과 7월에 걸쳐 비공개 혹은 정정 작업을 완료하였다.

3. 2. 대한민국 정부의 인정

2010년 9월 2일, 대한민국 정부는 히긴스에게 수교훈장 중 최고위 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1950년대 초 한국의 생존 투쟁을 보도한 공적을 평가한 것이다.[35]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히긴스의 딸과 손자가 참석하여 훈장을 받았다.[35]

4. 논란과 비판

마거리트 히긴스는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히긴스를 옹호하는 플로라 루이스(Flora Lewis)는 당시 여성이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강조하며, 압도적인 역경 속에서도 히긴스는 진지하게 승부를 걸었다고 말했다.[2]

전직 ''라이프'' 사진 기자였던 칼 마이댄스(Carl Mydans)는 "여성이 전쟁 지역—그들의 가장 신성한 영역—에 침입한 다음 동등하거나 때로는 더 큰 용기를 보여주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2]

4. 1. 직장 내 성차별 및 경쟁

어린 시절부터 경쟁심이 강했던 마거리트 히긴스는 그 습관을 뉴스룸과 해외 취재까지 이어갔다. 컬럼비아 대학교 동기였던 플로라 루이스(Flora Lewis)는 히긴스가 매우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과제로 기사 작성을 받자 히긴스는 동기들보다 먼저 도서관에 가서 관련 자료들을 모두 빌려왔다. 그녀는 당시 여성 기자들이 해야만 했던 일이라고 말했다.[2]

히긴스를 알았던 교수진과 동료들은 그녀가 어려운 인터뷰나 기사를 얻기 위해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존 테벨(John Tebbel)은 그녀가 매력을 이용해 경찰서장으로부터 그가 거의 한 적 없는 인터뷰를 받아냈다고 말했다.[2] 히긴스는 기사를 얻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했다. 당시 남성 동료들 중 일부는 그녀가 인터뷰나 정보를 얻기 위해 성적 호의를 베풀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으며, 다른 성공한 여성 특파원들도 직장 내에서 이러한 성차별을 경험했다.[11]

당시 언론계는 남성 중심 산업이었고 이중 잣대가 적용되었다. 남성의 성적 행동과 습관은 그들의 업무와 무관하다고 여겨졌으며, 정보나 기사를 얻기 위해 여성과의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받지도 않았다.[11] 전직 ''라이프'' 사진 기자였던 칼 마이댄스(Carl Mydans)에 따르면, 남성들은 취재 현장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겼고 여성들이 이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종종 허락하지 않았다.[2]

야망이 있고 성공한 여성 기자들은 종종 관계를 맺거나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최고의 과제, 취재원을 얻거나 경력을 향상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유명한 소문이 되었다.[11] 히긴스는 남성 동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했다.[2]

4. 2. 베트남 전쟁 보도 관련 논란

1963년, 히긴스는 뉴스데이(Newsday)로 옮겨 남베트남 취재를 맡았다. 그녀는 수백 개의 마을을 방문하고 주요 인물 대부분을 인터뷰하여 《우리의 베트남 악몽(Our Vietnam Nightmare)》이라는 책을 썼다.[10][30] 남베트남에서 히긴스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탐(David Halberstam)과 갈등을 빚었다.[2][22] 이는 특종 경쟁이 아닌, 이념 차이와 자존심 문제였다.[5][25]

20년 이상 전쟁 특파원으로 일한 히긴스는 확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녀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에 대한 불교 위기(Buddhist protests)가 공산주의자들의 조작이라고 믿었다. 이는 핼버스탐의 생각과 달랐으며, 그는 히긴스를 "전성기를 지난 매국노로, 반공주의적 견해가 선전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5][25] 핼버스탐을 비롯한 젊은 특파원들은 지엠 정권과 전쟁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히긴스는 그들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사이공(Saigon)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들을 "로버 보이스(Rover Boys)"라고 불렀다. 히긴스와 핼버스탐의 갈등은 히긴스가 사망한 후에도 핼버스탐이 그녀를 계속 비판하면서 이어졌다.[5][25]

5. 저서


  • 1951년, ''한국전쟁: 여성 전쟁 특파원의 보고서''(War in Korea: The Report of a Woman War Correspondent), 더블데이(Doubleday & Co.)
  • 1955년, ''뉴스는 특이한 것이다''(News Is a Singular Thing)
  • 1955년, ''빨간 벨벳과 검은 빵''(Red Plush and Black Bread)
  • 1965년, ''우리의 베트남 악몽: 베트남 비극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이야기, 미래 정책에 대한 생각과 함께''(Our Vietnam Nightmare: The Story of U.S. Involvement in the Vietnam Tragedy, with Thoughts on a Future Policy), 하퍼 앤 로(Harper and Row)
  • 2021년, ''냉전 특파원: 한국전쟁 이야기''(Cold War Correspondent: A Korean War Tale) (네이선 헤일의 위험한 이야기 #11)

6. 대중 매체에서


  •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메간 폭스가 연기한 "매기"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여성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와 마거릿 버크화이트를 참고해 만든 캐릭터이다.[41][15][36]
  • 필 피사니의 책 ''매기의 전쟁'' 주인공은 마가릿 히긴스를 기반으로 하였다.
  • 네이선 헤일의 그래픽 노블 ''냉전 특파원''에서 마가릿 히긴스를 각색한 인물이 해설자로 등장한다.[16]

7. 수상 내역

수상 내역
1951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 한국 전쟁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여성 최초로 수상.[40][17]
2010년 9월 2일 수교훈장 흥인장 추서.[18]
1946년 11월 23일 미국 전쟁장관 로버트 패터슨(Robert P. Patterson) 표창 (워싱턴 D.C. 행사, 종군기자).[20]
2016년 국가보훈처 선정 5월의 영웅 (한국 전쟁 영웅).[19]


참조

[1] 잡지 Pride of the Regiment http://www.time.com/[...] 2008-09-11
[2] 서적 Witness to War Beaufort Books, Inc
[3] 서적 News is a Singular Thing Doubleday & Co., Inc.
[4] 웹사이트 Biographical History http://library.syr.e[...] Syracuse University 2015-08-27
[5] 논문 Bias and Objectivity in the Cold War Reporting of Marguerite Higgins University of Florida
[6] 뉴스 Last Word https://web.archive.[...] Time 1950-07-31
[7] 웹사이트 International Reporting http://www.pulitzer.[...] The Pulitzer Prizes 2013-12-02
[8] 뉴스 Woman War Correspondent To Get Club's Highest Honor https://newspapers.c[...] 2019-04-15
[9] 뉴스 Women of Russia Collier's Weekly 1951-10-27
[10] 서적 News is a Singular Thing (back jacket)
[11] 서적 You Don't Belong Here: How Three Women Rewrote the Story of War New York Public Affair
[12] 뉴스 Marguerite Higgins Wed to Gen. W. E. Hall https://timesmachine[...] 1952-04-27
[13] 서적 Notable American Women: The Modern Period :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08-27
[14] 웹사이트 Burial Detail: Hall, Marguerite H https://ancexplorer.[...]
[15] 웹사이트 '장사리' 메간 폭스 출연에 숨겨진 사연은? [★비하인드] https://entertain.na[...]
[16] 웹사이트 COLD WAR CORRESPONDENT: A KOREAN WAR TALE https://www.kirkusre[...] Kirkus Reviews 2022-05-05
[17] 웹사이트 Marguerite Higgins Hits ‘Red Beach’ https://www.pulitzer[...]
[18] 뉴스 US War Correspondent Posthumously Awarded National Medal in Seoul http://www.arirang.c[...] Arirang News 2010-09-02
[19] 웹사이트 Award Announcement - South Korean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https://m.post.naver[...]
[20] 뉴스 TASK OF OCCUPATION DECLARED IN PERIL; Patterson at Dinner Honoring War Correspondents Says More Appropriations Are Needed https://www.nytimes.[...] 2020-11-26
[21] 잡지 Pride of the Regiment http://www.time.com/[...] 2008-09-11
[22] 서적 Witness to War Beaufort Books, Inc
[23] 서적 News is a Singular Thing Doubleday & Co., Inc.
[24] 웹사이트 Biographical History http://library.syr.e[...] Syracuse University 2015-08-27
[25] 논문 Bias and Objectivity in the Cold War Reporting of Marguerite Higgins University of Florida
[26] 뉴스 Last Word https://web.archive.[...] Time 1950-07-31
[27] 웹사이트 International Reporting http://www.pulitzer.[...] The Pulitzer Prizes 2013-12-02
[28] 뉴스 Woman War Correspondent To Get Club's Highest Honor https://newspapers.c[...] 2019-04-15
[29] 뉴스 Women of Russia Collier's Weekly 1951-10-27
[30] 서적 News is a Singular Thing (back jacket)
[31] 서적 You Don't Belong Here: How Three Women Rewrote the Story of War New York Public Affair
[32] 뉴스 Marguerite Higgins Wed to Gen. W. E. Hall https://timesmachine[...] 1952-04-27
[33] 서적 Notable American Women: The Modern Period :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08-27
[34] 웹사이트 Burial Detail: Hall, Marguerite H https://ancexplorer.[...]
[35] 뉴스 US War Correspondent Posthumously Awarded National Medal in Seoul http://www.arirang.c[...] Arirang News 2010-09-02
[36] 뉴스 '장사리' 메간 폭스 출연에 숨겨진 사연은? [★비하인드] https://entertain.na[...]
[37] 뉴스 TASK OF OCCUPATION DECLARED IN PERIL; Patterson at Dinner Honoring War Correspondents Says More Appropriations Are Needed https://www.nytimes.[...] 2020-11-26
[38] 뉴스 전장을 누빈 전설의 종군 여기자들 https://n.news.naver[...]
[39] 뉴스 '진짜 해병'으로 다시 태어나라 https://n.news.naver[...]
[40] 웹사이트 Marguerite Higgins Hits ‘Red Beach’ https://www.pulitzer[...]
[41] 뉴스 '장사리' 메간 폭스 출연에 숨겨진 사연은? [★비하인드] https://entertai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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